체다
어머니가 이야기 해주셔서 웃고 넘겼던, 어릴때의 기억이라 어렴풋한 일화중에, 비오는 어느날 길고양이가 불쌍했었던지 티셔츠안에 품고 집에 와서는 “엄마, 나 얘 키울거야” 하며 울고불고 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고양이는 내 배를 엄청 할퀴어대서 피가 범벅이었더랬지. 부모님의 반대로 키우지는 못했지만 어린 나녀석, 참을성이 좋았구나.
춘심이와 콩심이는 배우자님이 결혼 전 길에서 각각 구조한 야옹이들이다. 그렇게 함께 살게되어 어린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뭔가를 이룬 셈.
쏘스윗한 춘심이와 선택적으로 손을 타는(쓰다듬어 달라고 할때만 무릎이나 배에 올라와…) 콩심이 두 야옹이들 덕분에 정말 많이 웃는다. 정말 소중한 존재들이야.
몇 년 전에는 길에서 구조한 다른 야옹이(생강이)가 집에 몇 주 머물렀었다. 정말 예쁜 아이었는데, 춘심이 콩심이 이외에 더 이상의 식구를 늘리지 않기로 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춘심이는 콩심이는 엄마처럼 핥아주고 챙겨줬고 콩심이는 실제로 엄마로 알고 있는 듯 행동했던게 가장 컸는데, 새로운 고양이를 데려와서 합사에 실패하면 다시 길로 돌려보낼 수도 없는 일이라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춘심이는 걱정이 없었지만 항상 예민한 콩심이가 탈이 날까봐 사람들도 잘 초대하지 못했었다. 특히 콩심이가 한 번 엄청 아프고 난 후 부터.
아무튼 더 이상의 확장팩 없는 우리 네 가족, 오손도손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작년 가을, 그러니까 9월 23일 저녁이었다.
집 주변에 사는 고양이들을 위해서 물과 사료를 매일 채워줘서 대략 열댓마리의 고양이들 얼굴은 다 알고 있는데, 처음본지 며칠안된, 한 번씩 집 근처에 나타났다가 쳐다보면 도망가던 비쩍 마른 고양이가 오늘따라 계속 어슬렁대네? 게다가 부르니까 왔다갔다를 반복하다 결국은 들어올려도 가만히 있고?!
너무 말라있어서 습식 파우치를 까서 먹였다. 잘도 먹더라. 그리고는 다시 사라졌는데, 그 날 이후로는 매일 나타났다. 매일같이 습식 파우치를 먹이고, 다른 간식들도 줬다. 살이 좀 쪘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이 좀 쪄야 중성화 수술도 하지… 후후후…
이름은 “체다”로 지었다. 매일 보이는 녀석인데 이놈저놈하긴 좀 그래서.
언젠가부터 체다는 집 뒤편에 쌓아놓은 사용하지 않는 테이블 위에서 자더라. 마음이 불편해서 그 위에 작은 담요를 깔아줬더니 매일 거기서 잤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서 잘잔다면 잘된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몇 주 잘먹였더니 살이 많이 올라서 달랑 들어다가 동물병원으로 갔고,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
집 주변 다른 고양이들과는 달리 사람들을 봐도 도망가지 않고 손을 타는게 항상 마음에 걸려서 체다의 이름과 내 전화번호가 각인된 목걸이도 하나 걸어줬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주인없는 고양이인데 손을 타네 하면서 데려갈까봐.
사실 이때쯤 체다가 귀엽다며 지인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배우자님과 나도 그 사람이 데려가면 참 좋을거라 생각도 했었고. 이미 고양이와 살고있고, 경제적으로도 어렵지 않은 사람이라서 (콩심이가 아픈걸 겪어보니 이게 좀 중요하더라고) 딱 좋았는데, 미국에 살고있다는게 걸림돌이었다. 한 반 년만 참으면 내가 직항타고 데려다 줄 수 있을지도 몰라서 일단은 현상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그 즈음 나는 미국에 일이 있어서 2주정도 다녀와야 했는데, 그때는 이미 항공편과 여정이 결정되어 있어서 (게다가 그 사람은 한국에 잠깐 와있었다… 운명의 장난이 심하구먼)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미국을 다녀왔더니 체다녀석… 살이 많이 쪘더라 ㅋㅋㅋㅋ;; 원래 중성화를 하면 살이 찌는데, 어린애라서 한창 클 나이고, 쫄쫄 굶던애라 밥도 많이 먹고, 겨울이 다가와서 겨울털까지 쪄버리니까 잠깐 사이에 엄청 통통해졌다.
그렇게 잘지내는가 싶더니, 어느날부터 활동성이 조금 떨어지고 집주변 야옹이들과 장난치는 횟수도 조금씩 줄어들더라. 어디가 아픈가 싶어서 구석구석 살펴보니까 잇몸이 새빨개… 병원에 데려가니까 일단은 구내염이 의심된다며 항염제를 처방받았고, 약을 먹인 며칠 후 다시 잘먹고 활발하게 뛰어놀길래 한시름 놓는가 싶었다.
병원에서 테크니션분들이 너무 예뻐하셨다. 체다는… 놀이터인 줄 알더라. 혼자 신났었다.
그랬는데. 에휴…
집 앞뜰과 뒤뜰에 거의 살다시피 상주하는 다른 네 마리의 고양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되기 얼마 전에는 심지어 꼬박 하루동안 나타나지 않아서, 수색을 위해 옆 마을에 있는 산까지 올라간 적이 있었다. 분명 중턱에 엎드려 있는걸 봤는데 부르면서 달려가니까 도망을 가더라고. 이녀석…
그런일이 있었는데 또 사라졌다가 한나절이 지나서 돌아오질 않나… 걱정때문에 일이 잡히질 않았다. 날은 점점 더 추워지는데. 다른 고양이들은 서로 잘 어울리면서 노는데도 혼자 시큰둥하게 겨울집 위에 엎드려 있기나 하고. 한 번은 택배 정리한다고 현관문을 열어놨는데, 중문까지 들어와서 유리문 안쪽에서 밖을 보던 춘심이 앞에서 배를 보이고 눕기도 했었다.
체다가 또 사라진 때는 12월 31일, 2023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춘심이 콩심이 이외에 우리 인생에 집안 고양이는 더 이상 없어!”
“당연하지!”
…했었던 사람들이 입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체다를 집안에 데려오자는 생각을 그 동안 계속 하고 있었던거다. 배우자님이 먼저 “체다 돌아오면 집안에 데려올까?” 하고 아무런 문맥없이 말문을 여셨고, 나는 미사여구 없이 그러자고 했다. 뭐… 딱히 더 할 말이 없었다. 일단 체다가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잃은 채 창밖을 물끄러미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는데, 요녀석… 담장 위로 폴짝 뛰어 올랐다.
체다를 목욕부터 싹 시키고, 드라이어로 잘 말린 후 방 하나에 화장실과 사료, 물을 넣어줬고 그렇게 격리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긴장이 풀려서 마음이 어찌나 후련하던지 약간 졸리기까지 했었던 것 같다.
체다는 집안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어보였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방안을 한참 둘러보더니, 사료를 먹고 의자에 엎드려서 자더라고. 이럴거라고는 예상 못했는데…
아무튼 몇 주간의 격리, 그 이후에는 방묘창을 두고 춘심이 콩심이 누나들과 조우, 그리고 방묘문을 뛰어넘어(문자 그대로 체다가 뛰어넘었다) 합사까지 얼렁뚱땅 되어버렸다. 춘심이와 콩심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까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정반대더라. 춘콩심이는 관심은 있지만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체다가 쫄보더라고 ㅋㅋㅋㅋ;;
최근에 춘심이 누나와는 거리를 좁혀서 두다다다도 같이 하면서 뛰어다니는데, 콩심이누나는 여전히 무서워한다. 콩심이가 장난으로 쫓아가고 톡톡 때리는게 무섭나봐. 하긴… 만성비염 콩심이가 허공을 바라보다 엄청 요란하게 츄! 츄! 하고 재채기한 후 갑자기 쫓아오면 미친것 같고 좀… 그렇긴 하겠지.
집에 들어온지 두 달이 조금 지나, 집이 어느정도 익숙해진 체다는 침대 발치에서 자거나 나와 배우자님 사이에서 고롱고롱하면서 잔다. 편애하는 것은 아니고, 춘심이와 콩심이는 따뜻한 거실 바닥을 더 좋아하고 체다는 시원한 곳을 더 좋아한다. 후끈후끈 어린이는 다르더라. 그리고 가끔씩 콩심이가 배에 올라탈때 체다는 도망가버린다. 쫄보…
춘콩심이가 알아듣는 몇 안되는 인간어 “간식”도 알아듣기 시작했다. 외치면, 먹으러 달려온다. 아니, 아직까지는 뚜벅뚜벅 걸어오긴 한다.
밖에서 살때도 손을 잘 타줘서 그걸 신기하게 지켜본 다른 고양이들도(보, 랑이, 양이등의 애기들) 우리와 친해지게 만들어준 착한 체다. 자꾸 사라져서 지켜보는 사람들 얼굴을 허옇게 질리게 만든 얄미운 체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식구가 된, 체다.
식구가 된 걸 환영해. 지구별에서 행복하게 같이 잘 살아보자.